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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Samaria


히브리성경에는 소므론(שומרון-Shomron)이라고 등장하는데 왕상의 세멜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왕상 16:24, 그(오므리)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왕이 이를 소메론(Shomeron)리라 부른 연유에는 셈족의 언어의 뿌리에 "지키다(guard)"라는 의미가 있어 감시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가나안 정복이후 요셉지파에게 주었던 땅인데 솔로몬 왕이 후 왕국이 분열되면서 북쪽과 남쪽의 부족이 구분되어 있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왕인 호세아왕 때(726–722 BC)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침공해 도시를 점령하고 모든 사마리아 지역의 거주민을 앗시리아로 포로로 강제 이주시켰고 점령지인 사마리아에는 바벨론, 쿠다(Cuthah), 아와, 하맛, 그리고 스발와임 사람들을 거주시켰다(왕하17:3-6,24). 이는 그들의 통치 방식이었다. 결국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혼합이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쿠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쿳팀" 이라고 경멸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후 바빌론시대와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사마리아는 도시로 존재했고 기원전 332년경 알렉산더 왕때에 수천명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반란을 진압하러 와서는 그곳에 정착해 헬레니즘의 도시가 되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사이가 벌어졌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인들이 협력하기 원하여도 거절 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대적이 되어 바사국의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 하였고 일방으로는 그리심 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반대하게 되었다(스4:1-6).


기원전 128년에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고 기원전 108년에는 유대의 왕인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가 침공하여 성벽을 깨뜨리고 파괴하였다. 기원전 63년 사마리아는 로마에 의해 시리아 속주로 병합되었다.


기원전 30년 헤롯 대왕은 사마리아를 새로이 재건하여 크게 확장하고 도시 이름을 세바스테로 개명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했다. (세바스테라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어로 아우구스투스를 뜻한다)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한 웅장한 사원을 비롯해 약 4km 길이의 성벽과 요새를 새로 세웠으며 헬레니즘 도시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 사업이었다.


AD 6-9년경에 사마리아인 몇 사람이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 성전에 뿌리며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서로가 가진 오랜 증오를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사마리아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만난 여인의 이야기에서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그리심 산의 예배의 갈등의 모습이 드러난다. 누가복음 9:53절에서도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누가 선한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서 단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한다. 그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를 회피하여 이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마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선교태도를 보인다.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사마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나타나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사마리아인등 모든 민족에 대한 선교의 문을 열어 놓은 것으로 세상의 모든 족속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고있는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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